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문단 편집) ===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 버마도 당연히 '''나라 전체가 뒤집어졌다.''' 주권국가인 미얀마의 영토 안에서 그것도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 산의 묘소에 자기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북한이 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니 이는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과 동시에 미얀마를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미얀마 사람들도 많이 죽고 다쳤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외국의 정부 수반들이 방한하여 [[국립현충원]]/[[UN기념공원]]에서 참배하는 그 자리에서 방한한 나라와 적대 관계인 국가와 동시에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국가에서 파견한 공작원이 폭탄을 설치해 터트렸고 그 결과 방한국의 국가 수반들은 물론이요 그 자리에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럿 사망한 것이다. 나라가 뒤집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여도 (비록 자신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정보/경계/경호 작전 실패로 관련자들이 모조리 사임하는 헬게이트가 열릴 것이고 동맹국들로부터는 테러를 묵인한 것이 아니냐는 지탄을 받게 되니 매우 심각한 일이였다. 다만 버마 당국 역시 '''자신들의 국내에서, 그것도 아웅 산의 묘소라는 성지에서 테러가 발발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자기들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이어 오던 북한이 비록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목표 의식이 있다고 한들 자국에서 추앙받는 아웅 산의 묘에 폭탄 테러를 하는 미친 짓을 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이러한 테러 행위는 시도하는 순간 아무리 우호적인 국가여도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다. 북한이 그런 당연한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테러로 인해서 미얀마의 [[성역]]이나 다름없는 [[국부]](國父) [[아웅 산]] 장군의 묘소가 참혹하게 파괴당했다. 국부가 애매모호하고 논쟁의 대상인 대한민국과 바로 비유할 수 없지만 미얀마의 아웅산 묘소는 대한민국의 '''국립현충원''' 급으로 중요한, 북한에 비유하자면 '''[[금수산태양궁전]]''' 급으로 중요한 곳이다. 미얀마에서 아웅 산은 단순한 건국 공로자의 위치를 넘어서 국부 그 이상의 신성불가침 수준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다른 나라로 따지자면 베트남의 [[호찌민]], 인도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아프가니스탄의 [[아흐마드 샤 마수드]],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정도의 위치를 가진 위인이다. 게다가 아웅 산 본인도 테러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에 당시 미얀마인들로서는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피해를 당한 상황임에도 미얀마는 국제 사회에서도 체면을 크게 깎이는 굴욕을 당했다. 타국의 [[국가원수]]가 방문할 때는 자국의 국가원수 수준에 맞춰 보안 조치를 하는 것이 외교적 관례이자 상식인데 이런 식으로 외국에서 온 다수의 귀빈들이 죽고 국가원수가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것은 그만큼 미얀마의 치안 유지 및 사전 조치가 허술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얀마는 이전부터 북한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잘못 꼬이면 '미얀마가 북한과 짜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유인해서 암살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테러범이 명확했고 애초에 미얀마 정권이 [[문화대혁명|자기네 민족의 성지를 제 손으로 때려부수는 자살행위]]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별 말 없이 끝나긴 했다. 미얀마의 대통령인 우 산유는 물론, 당시 '''미얀마의 실권자'''였던 '''[[네 윈]]''' 사회주의 계획당 의장도 사건 당일 오후에 이례적으로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정중히 사과할 정도'''였으니 미얀마 측에서 이 사건을 얼마나 심각히 여겼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겠다. 테러 발생일로부터 25일째가 되는 1983년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마침내 테러범이 북한군 특공대원임을 밝히고 "범죄 집단인 북괴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괴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며 대한민국에 위로 및 사과 사절단을 보냈다. 몇 번의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다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미얀마에서는 '국내에서 외국의 국가 원수를 살해해도 자국의 국가 원수를 살해한 죄와 똑같이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는 얘긴데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보니 법이 미처 이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해서 발생한 해프닝이다. [[오쓰 사건]] 발생 직후도 이러한 이유로 논쟁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북한은 "테러범들이 북한 사람들도 아니고 북한과 관계 없다"며 범행 사실을 잡아뗐고 뒤에서 '''미얀마와 이면 교섭으로라도 붙잡힌 테러범들을 구출할 생각조차도 전혀 없었다.''' 미얀마는 [[친북]] 성향의 국가이기 때문에 북한이 보이지 않게 외교적으로 손을 쓸 여지는 있었다. 그럼에도 아웅산 자체가 미얀마의 국부급이다 보니 미얀마 국민들의 반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 테러가 일어난 후 미얀마는 북한과 [[국교단절|단교]]하여 외교 관계를 끊은 것은 물론이고 [[국가승인]]까지 취소해 버렸고 북한과 재수교하여 외교 관계를 다시 맺은 것도 것도 테러로부터 '''24년''' 뒤인 [[2007년]] 4월에 들어와서야였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이 정부 수립 이후 [[일본]]과 수교하지 않은 기간이 17년(1948~1965)이고 독립 이후 [[프랑스]]가 보복 차원으로 인력 철수와 인프라 파괴, 온갖 방해 공작들을 저질러 극심한 피해를 입은 [[기니]]가 프랑스와 수교를 끊은 기간이 10년(1965~1975)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웅산 묘소 테러가 미얀마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분노를 유발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부 관계자들이 사망한 일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본다면 [[2016년 방글라데시 다카 베이커리 테러]]가 있을 것이다. 당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의 지령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학살이 일어난 홀리 아티산 제과점(레스토랑)에서 내국인뿐 아니라 여러 외국인 관광객들이 피해를 입고 사망했는데 이로 인해 [[방글라데시]]는 테러에 [[나라 망신]]까지 콤보로 뒤집어쓰고 한동안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후 방글라데시에선 국가 주도로 추도식을 벌이고 각 관광객들이 속한 나라의 총리들도 와서 대거 참석하는 등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2017년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을 판결한 판사의 딸이 일본에서 [[의문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사건 현장에서 북한제 [[담배]]꽁초가 발견돼 북한의 보복성 암살이라는 추측도 제기됐던 것으로 밝혀졌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69&aid=000019751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